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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기념식 진행광복절을 하루 앞둔 지난 14일, 일본군 ‘위안부’ 기림의 날을 맞아 익산역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위안부'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아픔을 기억하고자 ‘기림의 날’ 기념식을 개최했다. 사진(일본군 '위안부' 기림의 날 기념식 진행) 2019년부터 매년 기림의 날인 8월 14일에 열리는 기념식은 올해로 4회째를 맞았으며, 시민들에게 기림의 날의 의미를 알려주고 올바른 역사관 정립에 기여하고 있다. 행사는 익산시가 주최하고, 사단법인 익산여성의전화와 익산일본군위안부피해자기념사업회가 함께 행사를 마련했다. 이날 기념식에서는 이다은 명창의 판소리를 시작으로 원음합창단의 공연, 조상익 교수의 색소폰연주와 시 낭송, 한국생활음악협회의 오카리나 연주 등 추모공연으로 진행됐다. 또한 송용희 시인의 헌화시, 청소년, 시민 등이 참여한 시민의 소리 낭독 순으로 이어졌다. 이 밖에도 평화의 소녀상 기념 포토존, 평화의 소녀상 건립 및 조례과정 전시, 필사 작업과 같은 시민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눈길을 끌었다. 이날 행사에서 행사 추진 관계자는 “오늘 우리는 ‘위안부’ 피해자의 숭고한 삶을 기리기 위해 기념식을 진행했다. 이번 행사를 통해 시민 모두가 기림의 날을 기억하고 올바른 역사의식과 여성의 인권 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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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의 독립운동가, 박영희 선생 선정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박영희(1896.12~1930) 선생을 ’2020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선생은 신흥무관학교 교관, 북로군정서 학도단장 등을 역임하면서 독립전쟁의 영웅들을 배출했으며, 김좌진 장군의 부관으로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숨은 주역으로 민족의 교관·군사 전략가이다. 충청남도 부여군 출신으로 1913년 휘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우던 중 은사인 이세영을 따라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하여 군사 지식을 배웠으며, 졸업과 동시에 교관으로 임명되어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20년에는 북로군정서의 사관연성소 학도단장과 김좌진 장군의 부관으로 일하면서 독립전쟁의 영웅들을 배출하는 한편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였다. 한편, 북로군정서는 사관연성소 출신으로 이루어진 만주 독립군 부대 가운데 가장 훈련이 잘된 정예부대로,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만주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지역에서 일제와 벌인 전투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뒀다. 청산리전투는 일본군의 간도 침입 작전을 완전히 차단해 만주지방에서 독립운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했으며, 이를 통하여 국내 독립운동도 우회적으로 지켜주면서 조국의 독립에 대한 확신과 독립정신을 고양시켰다. 청산리 전투 이후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하였으나, 자유시참변 이후 다시 만주로 돌아와 1922년에는 북로군정서 부사령관으로 활동했다. 1923년 9월에 중국 상하이에서 창간된 국한본문 잡지 「배달공론」에 <군사학 강의>를 두 차례 기고하는 등 군사지식을 보급하는 일에도 힘썼다. 이후 신민부에서 보안사령관을 맡아 총사령관인 김좌진 장군을 최측근에서 보좌했으며, 성동사관학교 교관으로 신민부의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1926년 김좌진 장군의 밀명으로 항일운동의 군자금을 협조받기 위해 블라디보스톡에 파견되어 활동 중 1927년 러시아 첩보기관에 체포됐으며, 1930년 연해주 고루지게에서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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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9월 독립운동가, 채원개 선생 선정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채원개(1895.3.24~1974.2.16) 선생을 ’2020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채원개 선생은 청년시절 3․1운동을 시작으로 독립군과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을 거쳐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무장투쟁의 긴 여정을 통해 조국의 독립에 헌신하였다. 무장으로서 강인한 기개를, 때로는 중재자로서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실천하였으며, 광복 이후에도 군에 투신하여 대한민국의 기초를 닦은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이었다. 평안남도 영원 출신으로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개신교 계열의 의명소학교를 졸업하고, 21세에 조선보병대에 입대하여 평생 걷게 되는 군인의 삶을 시작하였다. 이후 고향에서 3·1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었으나 탈옥하여 북만주로 이동하는 중에 유하현 삼원포에서 대한독립단 총단장인 조맹선을 만나 그의 부탁으로 대한독립단 군사교관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일본이 독립군 세력을 대대적으로 토벌하자 대한독립단 통임관구 지대장으로 열세인 병력과 물자로 일본군과 격돌하여 관통상을 입은 끝에 철수했다. 1921년 통의부 대표로 김창환·심용준 등과 함께 상해로 파견되어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였고, 이후 상해에서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하였다. 1923년 3월 한국노병회 특별회원에 선임되었고, 심용준과 함께 분열되는 임시정부의 단합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6월에는 낙양군관학교에서 기병과에 입학하여 체계적인 군사학을 배웠으며, 중국 군벌의 내전에도 참여하여 본격적인 실전 경험을 쌓았다. 1925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 주만 참의부 군무부장에 임명되어 정의부와 참의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만주로 건너가 직접 지도자들을 만나 갈등을 봉합하고 성공적으로 중재했다. 1927년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서 제대로 된 군사양성 기관이 없이 무장투쟁하던 조선인들에게 체계적인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1934년에는 광동 주재 중국군에 복무하면서도 한국독립당 광동지부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도 지속적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광주에서 중국군으로 재직시 동산백원을 임시정부의 임시청사로 제공하고 아세아 여관을 임시정부 요인 및 가족들의 숙소로 이용하는 데 기여하는 등 임시정부를 측면으로 지원하였다. 1940년 광복군에 합류하여 참모처장, 1943년 총무처장등을 역임하며 후방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으나 1944년에는 광복군 제1지대장에 부임하여 전면에 나서 광복군을 지휘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광복군 제1지대를 이끌고 광복군으로 귀국하려 했으나, 미군정이 광복군의 입국을 거절하고 개인 자격으로 입국만을 허락하여 부대를 해체하여 부하들을 먼저 귀국 시킨 뒤 1946년 상하이에서 선편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후 육군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마친 뒤 제3연대 작전참모로 부임한 이후 제3여단장, 제2사단장을 역임했고 1949년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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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꽃할머니>사진(평화그림책1, 『꽃할머니』 ; 글, 그림 권윤덕 ; 사계절 출판사 ; 2010) 우리에겐 역사가 있습니다. 세종대왕과 같은 찬란한 역사가 있고, 이순신 장군 같은 훌륭하고 빛나는 역사도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신 독립운동가들의 역사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세상 안에서 끝내 피워보지도 못하고 스러져간 위안부 할머니들의 역사가 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조국의 독립으로 우리 국민 누구나 마음껏 행복하게 웃었던 그날, 위안부 할머니들은 행복해도 슬픈 그런 날이 아니었을까요. 2020년 8월 15일 광복절을 앞두고, 아이들과 함께 읽어 보면 좋을 책을 소개합니다. 아이들에겐 어쩌면 조금은 어려운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아이들이 자라면서 마주하게 될 우리의 역사에서 할머니들의 아픔과 고통에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또한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숙제이며 평화로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권윤덕 작가의 <꽃할머니>는 심달연 할머니의 증언을 바탕으로 쓰여진 이야기입니다. 할머니는 13살의 어린 나이에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갔다가 모진 고초를 겪고 전쟁터에 버려졌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엉망진창이 된 마음과 몸 탓에 20년 동안을 기억을 잃고 사셨습니다. 일본에게서 끝내 전범임을 인정하는 어떠한 말도 진심어린 사죄도 받지 못하고 꽃할머니는 나비가 되셨습니다. 어릴 적 언니따라 나물 캐러 갔다가 영문도 모른 채 일본군에게 끌려갔을 때도, 전쟁 한 가운데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일본군에게 처참하게 당하고 있을 때도, 군인들에 의해 전쟁터에 버려질 때도 조국도 그 누구도 꽃할머니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꽃할머니의 기억상실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난 꽃이 좋아. 사람들이 꽃 보고 좋아하듯이 그렇게 서로 좋아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살아생전 꽃을 좋아하셨던 할머니의 말씀이 들리는 듯합니다. 할머니에게 꽃은 소망이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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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6‧25전쟁영웅‘ 장철부 육군 중령 선정사진(장철부 육군중령(1921.4.17.∼1950.8.4.)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90)태극무공훈장(’02)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장철부 육군 중령’을 2020년 6월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192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1944년 일본 주오(中央)대학교 법학과 재학 중 일본군 학도병으로 끌려가 중국 전선에 투입되었으나, 일본군의 일원으로 싸워야 하는 치욕감을 견디지 못해 2번의 탈출을 시도한 끝에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망명하였다. 자신의 일생을 조국의 독립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본명 김병원(金秉元)을 장철부(張哲夫)로 개명하였다. 이 후 한국광복군에 입대해 제1지대 제1구대 유격대장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군사방면에서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김구 선생의 추천으로 중국 황포군관학교 기병과에 입교하여 졸업하였다. 귀국 후 1948년 육군사관학교 5기로 임관한 그는 계속 학교에 남아 중대장, 전술학 교관 등을 지냈으며, 독립기갑연대 창설과 함께 기병대대장으로 근무하다가 6‧25전쟁을 맞게 되었다. 당시 장철부 소령의 기병대대는 경기도 의정부로 출동해 수색작전을 전개한 후 한강 이남으로 철수해 진지를 구축하였고, 6월 29일 한강을 도하하는 북한군 수백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또한, 7월 11일에는 충남 공주에서 북한군 제6사단 1개 대대를 섬멸하는 등 각종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8월 4일 경북 청송지구에서 청송-경주로 진출하려는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다 중상을 입고도 최후까지 총격전을 벌였으나, 대대 지휘소가 점령되기 직전“포로가 되는 수치를 당하느니 죽음을 택하겠다”라며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고 29년의 삶을 마감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전공을 기려 중령으로 1계급 특진을 추서했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2002년에는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